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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잡기/동탄

처인성(處仁城)

☜▩^^▩☞ 2018. 7. 1. 22:56

동탄의 경계선은 의외로 용인(龍仁)과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기흥나들목, 동탄나들목, 그리고 용인서울고속도로 등 동탄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모두 용인을 거쳐오고, 남쪽으로도 오산을 지나면 바로 용인시 남사면으로 연결되죠. 이 용인이란 지명은 지금의 신갈 지역인 용구현(龍駒縣)과 남사면 지역인 처인현(處仁縣)이 합쳐지면서 구+처이란 조합으로 탄생한 이름으로,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용인 역사의 한 축인 처인현의 처인성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용인시 처인구. 동서 또는 남북의 길이가 30km에 다다르는 거대한 행정구역이다.


처인성(處仁城)은 남사면 아곡리(위 지도에 화살표시)에 위치한 조그만 토성으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다, 성벽이나 성문도 없고, 남아있는 유적도 없다보니 그리 눈에 띠는 유적지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 더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인 '처인성전투'가 벌어진 곳이니, 현재의 아담한 모습에 비해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는 1232년 몽골의 2차 고려침략이 있었던 해로, 살리타이(Salitai)가 이끄는 대규모 몽골군이 고려를 침탈해 개경을 함락시켰고, 이때문에 고려 조정도 강화도로 피난을 가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처인부곡(部曲, 급이 낮은 행정구역으로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군량창고 정도가 있는 작은 성이었으며, 정규군이 아닌 지역 주민들과 일군의 승려들이 일으킨 의병이 몽골군의 침략을 대비하던 곳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전략적인 면에서나 인지도 면에서 몽골군이 굳이 함락시키고자 공격할 만한 성이 아니었습니다. 



한양을 함락시킨 살리타이는 주력은 강화도로 진격시키고, 본인은 경기도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일부 병력을 이끌고 광주>용인>수원>군포>부평>김포 순으로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첫 목표인 광주에서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게됐고, 두 번째 목표인 용인은 반대로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빈 성을 무혈입성하게 되니 별다른 전과가 없던 차에, 용인 남쪽 처인부곡에 군량창고가 있는 성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곳이라도 점령하자는 생각으로 소규모 병력만을 이끌고 이곳 처인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당시 이곳에는 승려 김윤후가 이끌던 승병 백 명과, 부곡주민 천여 명이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병력의 규모나 처인성의 상태가 대규모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라, 김윤후는 성 동쪽 산기슭에 저격병을 배치하여 기습공격을 노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는 지 몽골군이 너무 방심했는 지, 몽골군의 총사령관인 살리타이가 이 저격병의 화살에 맞아 사망한 것입니다. 물론 운도 좋았지만, 상대의 빈틈을 노린 훌륭한 전술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몽골군은 크게 동요하게 되어 처인성 전투에서도 패했음은 물론, 더 나아가 고려에서도 철군하게 되는데, 원나라의 역사에서도 총사령관이 사망하는 사건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라, 몽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으며, 서둘러 고려 조정과 강화를 체결하고 퇴각했다 합니다. 이 승리로 인하여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부곡민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습니다. 또한 처인성과 처인현이라는 지명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훗날 이 지역이 용인으로 명명되는 데 한 축이 되었으니, 처인성은 용인 역사에 아주 중요한 장소임에는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냥 봐서는 이곳이 유적지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성 입구의 저 푯말이 이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밤나무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으며, 성 둘레를 따라 산책로가 있어 둘러보기 좋다.


용인시에서 유적지로 개발하기 위해 뭔가 작업을 하는 듯 한데, 지금 그대로도 괜찮은 곳이 아닌가 한다.


시간이 흘러 흔적은 희미해졌지만, 역사를 알고 이곳에 서면 장소가 달리보입니다.


처인성, 가족들과 반나절 산책 코스로 역사도 되새기며 걷기 좋은 장소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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