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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손목 위에 올려놓은 우주 본문
리비아 체류기가 블로그 주제니 리비아 이야기를 위주로 씁니다만, 언젠간 리비아 이야기도 재료가 떨어질 테니 재료도 좀 아낄 겸, 또 간간히 오시는 분들이 심심치 않게 다른 먹꺼리도 좀 내놓을 겸, 오늘은 시계이야기를 포스팅 합니다.
저는 박학다식(薄學多識)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맨 앞 글자가 '넓을 박(博)'이 나니고 '얇을 박(薄)'임에 주의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잡스런 데에까지 호기심을 갖지만 깊은 데까지 파고들진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선 '큰소리'지만, 전문가 앞에서는 '깨갱'이란 말이죠. 또한 수많은 학문과 예술과 스포츠와 관심분야 중에서도 좋아하는 것만 '편식'하니 박학편식(薄學偏識)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중 오늘은 시계, 손목시계 이야기입니다.
휴대폰이 보급된 이후로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은 많이 줄었습니다. 휴대폰에 늘 1초 내외의 오차밖에 없는 첨단시계가 내장돼 있기 때문이죠. 상대적으로 손목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만 많아지고, 별다른 기능도 없습니다. 어린시절의 전자시계는 스탑워치나 계산기 같은 것도 있고 해서 나름 시대의 첨단 기기였지만, 지금은 동영상 재생에 인터넷 정도는 되야 나름 첨단 수식어가 붙으니, 그것과도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랩니다. 하지만, 전 시계를 좋아합니다. 그것도 바늘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아날로그 시계를 좋아합니다.
인간에게 시간의 흐름을 알게 해주는 건 해와 달과 별(계절의 변화는 별자리로 알아볼 수 있죠)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루', '한 달', '한 해'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이걸 다시 '시', '분', '초'로 나누어 일상의 일들이 이어지는 시간을 가늠합니다. 짧게는 언제 아침을 준비하고, 언제 밥을 먹으며, 언제 학교에 가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를 알게 하고, 길게는 언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언제 추수해야 할 지를 알게 합니다. 얼만큼 기다려야 오븐에서 고구마가 맛있게 익어갈지, 얼만큼만 기다려야 라면이 불지 않을 지를 알 수 있게 된 거죠.
이런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장치가 시계입니다. 인간이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잘게 쪼개고, 누군나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게 만들어 손목 위에 올려 놓은 게 시계란 장치의 정체죠. 그래서 시계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우주가 담겨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죠. 제가 시계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
그래서 시계를 만든다는 건 우주를 축소하는 작업입니다. 해와 달과 별을 손목 위에 옮겨 구현하는 작업이고, 그를 위해 엄청난 기술적, 예술적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죠. 전자제품 시계나 기계로 찍어내는 시계보다 사람이 손으로 다듬어 조립하고 디자인한 시계가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실재로 기계식보다 전자식이 더 오차없이 정확하게 작동하지만, 기계식 시계가 훨씬 값어치가 있는 건 이 같은 이유입니다. 또한 기계식 시계는 지속적으로 태엽을 감아주고, 주기적으로 정비도 해야 하는 등 훨씬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죠. 만드는 사람부터 사용하는 사람까지, 사람의 손으로 완성되는 우주, 그게 기계식 시계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출처 : Ulysse Nardin 홈페이지 |
여기 시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율리스 나르당(Ulysse Nardin)의 Tellurium Johannes Kepler입니다. 1846년 스위스 르로끌(Le Locle)에서 설립됐으며 천문시계로 유명한 시계메이커입니다. 이 시계는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케플러의 이름을 딴 시계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라 이름 붙인 시계와 함께 이 회사의 대표적 걸작입니다.
시계 가운데 지구는 정확히 하루에 한 바퀴 회전하며(위쪽이 낮, 아래쪽이 밤),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알려주는 가운데 철선은 계절에 따라 아래위로 휘어져 동지에서 하지까지의 낮과 밤의 길이변화를 보여줍니다. 현재 달의 위치와 모양(5시 방향에 작은 원)을 알 수 있으며, 12시 방향의 별자리와 월 표시로 계절 변화를 알 수 있고, 용머리와 꼬리(파란색)로 일식과 월식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현재시각을 알려주는 시침과 분침이 있습니다.
위의 시계는 제가 꿈꾸는 이상적인 시계입니다. 저 모든 것을 단지 태엽과 톱니바퀴의 조합으로 구현한 예술품이고, 전자회로나 메모리에 의존한 게 하니라 오로지 1초 1초가 86,400번 반복해 지구가 한 바퀴 돌고, 31,556,952번 반복해 계절이 한 바퀴 순환하게 만들어진 장치죠. 그것을 위해 시계 장인은 저처럼 아름다운 시계를 디자인하고, 복잡한 톱니바퀴를 다듬으며, 정밀한 1초를 만들어내기 위해 미세한 나사를 조정합니다.
출처 : Patek Philippe 홈페이지 |
여기 또 하나의 시계를 소개합니다. 시계메이커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의 Sky Moon Tourbillon입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1851년 설립됐으며 가장 정교하고 정확하며 비싼 시계를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자타공인 최고의 시계메이커죠.
이 시계는 양면시계입니다. 앞면은 퍼페츄얼 캘린더(월별 날짜수 변화와 윤년의 변화까지 계산해서 나타내는)라 불리는 월, 일 표시창과, 문페이스(현재 달의 모양을 표시하는 부분)가 있고, 뒷면에는 계절과 날짜에 따라 변화하는 밤하늘의 별자리와 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저 별자리는 은하수의 모습을 대충 나타낸 듯 보이지만, 실재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하나하나 재현한 것입니다.
이 역시 시계의 완벽한 이상형입니다. 더군다나 양면으로 되어있어 그 정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뚜르비용(Tourbillon: 시계추 부분을 회전하면서 흔들리도록 만들어, 시계의 착용자세에 따른 중력의 영향을 줄이는 시계제작기술)까지 적용돼 있습니다.
출처 : Omega 홈페이지 |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의 시계들보단 조금 더 대중적인 시계를 하나 소개합니다. 오메가(Omega)의 Speedmaster Professional 입니다. 이 시계는 최초로 달에 간 시계이기도 하죠. 사진은 달착륙 40주년을 기념하여 판매되고 있는 기념모델입니다.
당시 아폴로 우주선에는 물론 정밀한 전자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자시계는 우주선에 이상이 생겼을 때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죠. 그래서 우주인들에게는 기계식의 손목시계가 하나씩 지급됐는데, 그게 바로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였습니다. 물론 다른 시계도 가능했겠지만 이 시계가 선택된 건, 선택을 위해 시행된 수많은 극한 테스트에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킨 유일한 시계가 바로 오메가였기 때문입니다.
우주공간에서도 시계를 볼 수 있게 스트랩으로 우주복 바깥에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달 착륙의 순간에, 달에 두 번째 발을 디딘 버즈 올드린(Buzz Aldrin)과 함께 달에 간 최초의 시계가 됩니다. 당시 암스트롱(Neil Armstrong)의 오메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착륙선 안에 보관했죠.
사실 기계식 손목시계를 선택한 NASA의 판단은 아폴로 13호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이 우주선은 사고로 기체 일부가 부서져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지구로 귀환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달 궤도에 있는 우주선을 지구로 출발시키기 위해선 정확한 타이밍에 로켓을 분사해야 했는데, 하필 그 타이밍이란 지구와 통신이 끊기는 달 뒷편인데다, 사고의 여파로 우주인들의 생존을 위해 우주선의 모든 기계장치(시계를 포함한)는 작동을 정지시킨 상황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우주인들의 손목에 있던 오메가 시계였죠.
이 일로 오메가는 NASA로부터 'Snoopy'상을 받게 됩니다. 이쯤 되면 오메가 스피드마스터란 시계는 그냥 시계가 아니라 진정한 '명품'이라 할 만 합니다. 손목 위의 작은 우주는, 우주에 길을 잃은 인간을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으니까요.
출처 : NASA |
자, 여러분의 우주는 당신의 손목 위에서 오늘도 멋진 스토리를 함께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 자리가 비어있다면, 휴대폰의 시계 대신 당신의 우주를 손목 위에 올려놔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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