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취미 그리고 잡설

사브라타(Sabratha) 본문

리비아

사브라타(Sabratha)

☜▩^^▩☞ 2009. 10. 31. 01:00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고대 로마의 도시가 셋 있는데, 트리폴리 그 자신과 동쪽의 랩티스 마그나(Leptis Magna), 서쪽의 사브라타(Sabratha)가 그들이다. 이 중 사브라타는 트리폴리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65km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유적지는 도시 북서쪽의 해안에 자리한다. 이곳은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구글 맵
리비아의 서쪽 해안,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의 지도. 왼쪽으로부터 사브라타(Sabratha), 트리폴리(Tripoli), 랩티스마그나(Leptis Magna)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일전에 갔던 꼬브리에서 승합택시를 잡아탔다. 서로 말이 잘 안 통하니 시계를 하나 꺼내놓고 '지금 사브라타로 가서 2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란 얘길 하는데, 동네 택시기사들 다 모여서 쑥덕대더니 알아듣는 눈치다. 40 디나(4만원 정도)에 합의를 봤다.

사브라타는 필자가 머무는 자위아에서 가까웠다. 구글어스로 어림은 했지만, 채 반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하니 생각보다 가깝단 느낌이다. 그런데 이 운전기사, 바로 유적지로 가질 못하고 경찰관에게 길을 물어본다. 아마, 알기는 하되 가보진 않았나보다. 하긴 우리 역시 지척에 두고도 못 가본 유적지가 어디 한둘이랴.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로마유적을 자신들의 역사로는 잘 인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란 게 사람의 이야기이니 그 땅에 있다 한들 그들의 기록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구글 맵(어스 이미지)
사브라타 이미지. 아래쪽에 입구와 주차장이 보이고, 바로 이어서 원형극장이 있다. 왼쪽 바닷가에 목욕탕 등이 있으며, 오른쪽 사진 밖으로는 원형경기장이 있다.

아무튼, 그러는 사이 입구에 도착해 기사에게 다시 한 번 2시간의 시간약속을 다짐받고 우리는 유적지로 들어갔다. 입장료는 6 디나, 어디가나 이런 입장료는 같은가 보다. 어디선가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가려면 추가로 돈을 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 물어봤으나 그건 아니란다.

입구 좌측엔 조그만 식당과 화장실,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건 멀리 보이는 거대한 원형극장의 유적이다. 지금이라도 성대한 공연이 열리고 있는 듯, 우리는 공연에 늦어버린 관객마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극장으로 향한다.

극장 앞 유적

원형극장의 객석쪽 주 출입구 모습. 일부 부서지긴 했어도 웅장한 규모다

무대 뒷배경 3층 구조물인데 그 자체로도 대단한 볼거리

사브라타의 원형극장은 당장 극장으로 써도 될 만큼 그 원형이 많이 보존돼있다. 3층 규모의 무대배경은 웅장하다 못해 감동이 느껴지는 구조물이며, 수천명의 인원을 수용할 듯한 객석 또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리에 앉아 상상의 시간여행을 해본다. 사람들이 웅성이며 웃고 떠들며 모여드는 극장의 모습을. 과연 여기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저 거대한 무대에선 또 무슨 공연이 벌어졌을까? 이 자리 하나하나에 그들의 삶, 행복과 기쁨과 슬픔과 고뇌가 고스란히 스며있을까?

그렇게 상상 속에서 헤매이다가 문득 사진을 찍기 위해 일어섰다. 다행히(?) 내겐 카메라가 없어서 사진을 찍기보단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몇 년을 써온 캐논의 똑딱이 카메라가 리비아에 와서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새 카메라를 공수 받았지만 말이다.

원형극장의 객석

무대 단에 새겨진 부조

이 날은 사이트 전체에 바다안개가 조금씩 몰려오고 있었다. 원형극장의 중앙무대를 통과하여 바닷가로 내려갈 때 쯤 절정에 달해 어슴푸레 극장이 희미해지니, 과거로부터 거슬러 눈 앞에 나타났다가는 다시 과거로 사라지는 마냥 발에서도 멀어지고 눈에서도 멀어진다. 극장 안쪽의 사람들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 한다.

바닷가 쪽으로는 공중목욕탕과 사우나의 유적이 자리한다. 그 유명한 로마식 화장실, 서로 나란히 앉아 용변과 사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머쓱한 화장실이 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지는 말란다. 엉덩이 까고 앉아서 다시 한 번 상상 속의 시간여행을 해보려 했건만. 바닷가 욕탕은 그 위치나 전망이 운치있다. 부산 달맞이고개에 전망좋은 찜질방이 하나 있는데, 사브라타와 비교하면 저리가라다. 바다의 때깔이 틀리다고나 할까? 바닥에 장식된 타일마저 예사롭지 않은 게 역시 로마인들은 인생을 좀 알았던 모양이다.

목욕탕의 타일바닥. 정교함이 대단한 예술작품이다.

바로 그 화장실. 나란히 앉아 므흣하게...

로마식 포럼의 입구다. 지금은 앙상하게 기둥만 일부 남아있다.

사자탑.

아쉽게도 사브라타의 유적은 많이 남아있질 않다. 그나마도 리비아 정부에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듯 보호조치도 없고 복원하고 있는 흔적도 없어 보인다. 덕분에 우리 같은 관광객이야 직접 만져보고 올라보고 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다듬고 관리하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면 유적이 훼손될까 염려도 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관심도 가고, 보존도 되고, 다시 인류의 유산으로 부활하지 않을까 한다. 경복궁의 경회루도 사람의 손때가 타지 않아 수명이 짧아 졌다고 하니, 자연은 사람을 멀리해야 하고, 역사는 사람의 발길이 닿아야 하나보다.

사브라타를 떠나는 길에 마침 안개를 뚫고 햇볕이 비춘다. 휴대폰 카메라 덕에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게 황금의 도시 같다.



반응형

'리비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비아 모터쇼  (4) 2009.11.02
안녕하세요? 인사말을 배워봅시다  (2) 2009.11.01
리비아의 화장실  (8) 2009.10.28
리비아의 시간 UTC+2  (4) 2009.10.27
리비아의 물가  (11) 2009.10.26
Comments